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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6-0401(Print)
ISSN : 2383-6334(Online)
The Research Journal of the Costume Culture Vol.23 No.3 pp.439-453
DOI : https://doi.org/10.7741/rjcc.2015.23.3.439

A study of the shape and tailoring of frock coats in the Korean Empire

Eunjoo Choi†
Dept. of Fashion Design, Youngsan University, Korea
Corresponding author (cej1214@ysu.ac.kr)
March 14, 2015 April 29, 2015 April 30, 2015

Abstract

This research is regarding Park Ki-Jong’s Western-style court costume and emphasizes the shape and style peculiarities of Western-style court costumes in the Korean Empire from the 1876 Port Opening to the 1910 annexation of Korean to Japan. Park Ki-Jong’s frock coat was made during the period of the established law from 1900 to 1910. 1) The brand was ASADA TAILOR from Kyung-Sung. 2) The shape was long at the front and back, and it featured a picked lapel and double breast with six buttons to fasten and two buttons for decoration on the upper part. 3) The frock coat's materials were black wool fabric and black ridged silk. The lining's material was black plain silk and the sleeve's lining was white with blue striped silk. 4) The front separated the upper and bottom parts. The bottom was composed of a one-piece A-line skirt that continued from the front to back. The top of the back was separated by the princess line and the center-back seam was also separated with a vent. However, the center-back of the waistline was not separated, and it continued to one piece. The sleeve shape was a two-piece sleeve style with a phony vent and two wrapping buttons.


대한 제국의 모양과 드레스 코트의 원단의 연구
- 공원 기 - 김정일의 드레스 코트 -

최 은 주†
영산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초록


    Youngsan University

    I.Introduction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왕조의 국가로, 고종의 아관파천 (1896.2.11.~1897.2.25.) 이후부터 일기 시작한 자주 독립의 의지가 표출되어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 (RJCC-23-439-image.gif)로 확정반포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 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대한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대내외에 거듭 재 천명한 것이며,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 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Kang, 2005; Kim, 1987).

    일반적으로 복식사 연구에서 개화기는 최초의 개항시기에 맞추어 강화도수호조약이 체결된 1876 년부터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010년까지로 시대 구분을 한다(Ryu, 1980). 그러나 복식의 변천에 있 어서 대한제국은 이때부터 광무개혁이 진행되었으 며 관복에 있어서 , 양복 도입은 이 시기에 이루어 지게 되었다. 먼저 1899년 8월 외교관의 복장에 양 복이 도입되고, 1900년 4월 17일 발표한 칙령에서 는 문관의 대례복, 소례복, 상복을 서양식 관복으로 제정하였다. 이처럼 서양식 관복(대·소례복)은 1900 년에 제정되어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는 1910년(융 희4)까지 존속하였다.

    1900년 4월 17일 칙령 제14호 “문관 복장 규칙” 과 칙령 제15호 “문관 대례복 제식”을 발표하였고, 1904년과 1905년, 1907년에 걸쳐 관보(RJCC-23-439-image1.gif)에 ‘정오 (RJCC-23-439-image2.gif)’의 형식으로 수정되었다(Korean Empire Ministry Record Section, 1982). 최종적으로 개정된 문관복 장 규칙은 1908년 “법규류편(RJCC-23-439-image3.gif)”에 총 12조 와 부칙1조로 되어 있다. 이들 규칙에서 소례복을 살 펴보면 1904년, 1905년에 소례복 기록이 나오고 있 으며, 1907년에는 소례복으로 프로코트가 기록되어 있다. 1908년 기록에는 더 세분화되어 소례복과 상 복은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이 공통으로 착용하고, 대례복은 칙임관과 주임관만 착용한다고 되어 있 다. 그리고 소례복 일습에는 연미복과 프록코트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으며, 이 둘은 착용일이 서로 달랐다. 프록코트는 궁내 진현 시, 각국 경절 하례 시, 사적으로 서로 예방 시에 착용하도록 되어 있 다. 또한 상장(RJCC-23-439-image4.gif)으로 대례복, 연미복, 프록코트 의 조전(RJCC-23-439-image5.gif) 착용이 기록되어 있고, 부칙에 대례복 을 미비한 관원은 소례복(프록코트)으로 대신 착용 하여도 무방하다고 기록되어 있다(Lee, 2011; Korean Empire Ministry Record Section, 1982). 이로써 조선 왕조 500년의 구관복제도는 완전히 서양화되었다 (Kum, 2002).

    개화기 복식에 관한 선행연구들은 Lee(2008)의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 패러다임, Lee(2011)의 대례복에 관한 연구, Lee(2013)의 대한제국기 문관 대례복 제작에 관한 연구, Choi(2011)의 1905~1906 서구식 대례복제도 개정에 나타난 일제의 한국병 탄 준비, Choi(2008)의 대한제국기 궁내부 대례복 연구, Kim(1977)의 개화기 문관복에 대한 연구, Lee (2010)의 대한제국 1900년(광무4) 문관 대례복 제 도와 무궁화 문양의 상징성, Lee(2011)의 대한제국 기 서구식 문관대례복 제도의 개정과 국가정체성 상실, Kim(1987)의 개화기 양복 도입과 수용과정 등 에 관한 연구, Lee and Kim(1995)의 우리나라 양복 수용과정의 복식변천에 개한 연구, Hwang(2000)의 개화기 한국복식의 변천, Park(2003)의 개화기 복식 의 변천, Lee(1984)의 개화기 복식의 변천과 그 요 인, Kim(2010)의 개화기부터 광복 이전까지 신문, 잡 지에 기록된 외래어 복식명칭에 관한 연구, Lee(2012) 의 일본의 영향을 받은 개화기 남성 복식의 서양화, Lee and Lee(2000)의 19세기 개항 이후 한·일 복 식제도 비교 등이 있으며, 주로 대례복과 양복 수 용, 복식 변천 등에 관한 연구 및 분석이 이루어지 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소례복, 통상복으로 사용되었던 프록코트에 관한 연구는 미흡하였다. 대한제국기 당 시에 착용된 대례복 유물의 경우 ‘문화재청 의생활 분야 목록화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5점이 등록되어 있고, Lee(2013)의 연구에서 각 박물관에 소장 중인 6점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복되는 유물들을 제하면 8점 정도의 대례복이 현재 유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화재청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모 닝코트 9점이 등록되어 있으나, 이들 중 대한제국 기와 일제강점기의 유물은 8점이다. 그러나 대한제 국기 당시 소례복이었던 프록코트는 문화재청 조 사보고서에 전혀 없었다. 프록코트 유물도 시기적 으로는 어느 정도 남아있을 듯 하지만, 개개인 후 손들이 소장하고 있는지, 박물관들의 소장유물들이 아직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는지 조사에서 드러나 지가 않았다. Lee(2013)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대한 제국기의 유물들이 100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되어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관의 상태에 따라 낡아지 고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부산박물관에서 소장 하고 있는 대한제국 당시의 실존인물로 본인이 직 접 착용하였던 착용시기가 명확한 박기종의 기증유 물 중 서양식 관복인 프록코트와 착용사진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형태 특성과 테일러링에 대해 유물 을 중심으로 실증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박기종의 프록코트는 문화재청의 문화재 대상 기준에 해당 하는 근대 의생활 분야 유물로 문화적, 사회적, 학 술적 가치와 더불어, 복식사적 그리고 문화재적 가 치를 포함하고 있는 유물로 현재 부산시 지정문화 재로 등록되어 있다. 그리고 차후 우리나라 남성복 변천사에 있어서 대한제국기 당시 서구식 양복 중 하나로 통상복과 소례복으로 착용되었던 프록코트 의 복원이나 재현 등이 필요할 때, 프록코트의 형 태적 특성과 테일러링, 도식화 등이 기초자료로 활 용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II.Background

    1.The process of western costume adoption

    우리나라 개화기와 일제침략 시기는 서양문물의 급격한 전파로 우리나라 복식사 중 하나의 전환점 이 되는 시기로, 중국복식과의 이중구조에서 벗어 나 기존 복식이 간소화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었으 며, 양복이 도입되어 양복과 이중구조를 갖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양복 수용과정의 유행선도자로는 유학생, 외교관, 신식교육기관의 학생, 전도부인, 군 인, 정부관리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Lee & Kim, 1995).

    1881년 12월~1882년 4월 사이 일본 유학생들의 일본학교의 요구와 필요에 의한 단발양장이 시작 되었고, 1882년 임오군란 발생 후 박영효가 수신사 로 일본을 방문하고, 이때 수행원으로 김옥균, 서광 범, 민영익이 함께 가서 천왕의 생일에 초대받아 초대장에 명시된 대례복을 입어야 했으며, 외무경 자택의 연회에는 초대장에 명시된 소례복을 착용 하여야 했다. 이 당시 일행들이 일본 요코하마에서 서양식 준예복인 색코트(Sack coat)를 사 입었던 것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복의 착용으로 알려 져 있다(Ticon, 2006). 그 밖에 고종왕비의 생일 하 례 때 각국 공사를 초청하여 연회를 열었는데, 이 때 역시 외교활동을 위해 일본에서 양복을 구입하 여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83년 미일수호조약 의 비준을 위해 미국에 보빙대사를 파견하였으며, 미국시찰 중 양복을 구입하였다(Lee, 2000). 1895년 4월 7일 칙령 제78조로 육군복장규칙을 반포하여 훈련대 보병과 장교복식이 양복화 되어 9월에는 일 반군인까지 해당시켜 구군복이 자취를 감추고, 서 양식 군복이 착용되었다. 8월 10일 을미의제개혁부 터 대례복, 소례복, 통상예복의 체계를 완전하게 갖 추었으나, 복식의 종류는 전통적 관복인 흑단령과 두루마기로 과도기적인 개혁에 머물렀다(Lee, 2010). 11월 15일 단발령과 함께 의복제도 외국제를 채용 되는 무방하다고 함으로써 문관복도 서양식 복장 으로 변하였다. 1899년 6월에 황제의 복장도 육군 복장에 준하게 되었으며, 8월에는 외교관의 복장이 양복화 되었다(Kum et al., 2002). 1900년 4월 17일 칙령 제13호로 훈장규칙을 정하고, 제14호로 문관 복장규칙을 정했으며, 제15호 문관 대례복 제도를 정하여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었다(Lee & Kim, 1995). 이는 전통적인 복식체계로부터 벗어나 유럽의 여 러 국가들과 일본에서 받아들이고 있던 복식제도 를 채택한 것이며, 서양이 주도하는 국제관계에서 통용되는 복식체계로 나아간 것이다(Lee, 2010). 1904 년 한일의정서 체결에 따른 보빙대사로 일본 간 보 수파 이지용이 수행원들과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 고 떠났으며, 1904년 6월 친일단체 일진회원들이 양복을 착용하고, 10월에는 외무부 직원일동이 단 발에 양복 착용하였다. 1905년 을미보호조약이 체 결되기 직전 학부의 직원과 학생들이 단발에 양복 을 착용하고, 1906년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단발 에 양복착용은 더욱 활발해졌다. 1910년대에는 최 신 유행의 프록코트가 일반에게 퍼질 정도로 양복 의 유행이 급속하게 되었다(Ryu, 1981).

    양복 수용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으로 기록과 유 물로 남아있는 서양식 관복은 1900년부터 1908년 에 걸쳐 변화되어온 문관의 관복으로 다음과 같다. 대례복은 대례모, 대례의, 조끼, 대례고, 검, 검대, 백색칼라, 백색장갑으로 구성되고, 영국의 궁중 예 복을 모방한 일본의 대례복을 참작한 것으로 궁궐 에서 황제를 알현하는 상황에 착용하였다. 소례복 인 프록코트와 연미복은 유럽제국에서 사용되던 시민의 예복으로 진사고모(Silk Top Hat), 구제연미 복 또는 프록코트, 조끼, 바지로 구성되고, 연미복 은 각국 사신 소접 시, 궁중 사연 시, 국외국 관인 만찬 시에 착용하였다. 프록코트는 궁내진현 시, 각 국 경절 하례 시, 사적인 하례와 예방 시에 착용하 였으며, 상복은 서양에서 착용되던 시민의 평복인 세비로(sack coat)와 같은 것으로 구미평모(중절모 자), 구제통상의, 조끼, 바지로 구성되고, 임시로 진 현할 때, 연거할 때, 집무 할 때 착용하도록 규정되 었다(Ryu, 1981; Lee, 2011).

    2.Park Ki-jong

    박기종은 1839년(헌종5) 11월 지금의 부산광역 시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에 68세로 사망하였다. 자는 형진이고, 본관은 밀성(밀양)이다.

    그는 개항 전인 1869~1871년에는 동래부 소통사 로 활동하였고, 1869년에는 거제도 옥포를 담당하 였으며, 1876년 5월에 김기수를 따라 수신사의 일 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고, 1880년 6월 김홍집이 수신사로 파견될 때도 통사로 일본에 갔었다. 1880 년 이후 관계 진출이 두드러지는데, 기증유물 중 교지 24점에서 보이는 주요 경력들은 용양위부호 군(1880년), 용양위부호군 경위궁위장(1883년), 부 산항경찰관(1886년), 다대포진수군첨제사 겸 동래 감목관(1893년), 부산항사검관(1893년), 친군총어영 기사장(1893년), 절영도진수군첨제사(1894년), 부산 항 경무관(1894년), 외부참서관(1898년), 중추원의관 (1900년), 파리공사(1905년) 등이다.

    특히 1886년부터 1898년까지 10여 년 동안 부산 항 경찰관, 사검관, 경무관 등으로 근무하면서 개항 장의 치안과 무역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박기종 은 일찍부터 근대문화 수용의 필요성을 느껴 조선 근대화에 필요한 교육기관(개성학교)을 1895년 5월 설립하고, 1896년 3월 1일 100명의 학생으로 영주 동 교사에서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우리나라에 3번 째로 세워진 일어학교로 1897년 1월 공립학교로 인 가를 받고, 1905년에는 3개 지교, 4개 보조교를 가 진 부산, 경상도 일대의 중심적 일어학교가 되었다. 개성학교는 현재 개성고등학교(전 부산상업고등학 교), 개성중학교, 봉래초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부 산항 경찰관으로 재직 시 기선회사 설립에 착수하 여 1889년 4월 통리아문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아 구포, 삼랑진 등을 왕래하면서 운항하였으나, 1893 년경 오사카상선에 귀속되었다. 1898년부터 일제 의 철도 침략에 대응해 최초의 민간인 철도회사를 설립하는 등 철도건설에 주력하였으나, 자금조달과 부설권 문제 등으로 실패하였으며, 조선인 경제단 체를 조직하는 등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 인 인물이다(Kim, 2005).

    유품 중 1898년 3월 22일부터 1899년 3월 25일 까지의 일기 <상경일기>에는 외부참서관에 임용되 기 직전부터 서울에 생활하면서 한말 외교관계의 중요사항을 매일 일기체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도총> 1권은 1898년 6월 13일부터 1899년 3월 7 일, 2권은 1899년 3월 9일부터 1900년 9월 29일까 지 사실을 국한문 혼용체로 외교상의 현안문제들을 처리하면서 처리결과, 자신의 의견, 정부의 지시들을 모아 놓은 자료들로 당시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후손 박상수 씨가 1978년 부산박물관에 기 증한 유품 106점은 부산의 근대화 뿐만 아니라, 대 한제국의 외교사까지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들로 이들 중에는 복식류가 19점으로 모두 직접 사 용하였던 것으로 단령 2점, 관모(사모) 1점, 목화 1 점, 대 1점, 관복함 1점, 원다회끈 1점, 대례복 상의 1점, 대례복함 1점, 대례모 1점, 대례모함 1점, 대례 검 1점, 검대 1점, 프록코트 1점, 조끼 2점, 바지 1 점, 관자, 단추 등이며 이들 중에는 문관 칙임관(정 1품~종2품 관료) 시절에 착용하였던 칙임관 2등에 해당하는 복장들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 양복 수용시기를 고려해 볼 때 박기종 의 유물자료인 프록코트는 1900년 “문관복장규칙” 발표 이후 1900년에서 1907년 사이에 착용하였던 의복으로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이는 유물자료 중 독사진(Fig. 1)과 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Fig. 2)에 서 프록코트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생전에 착용하였던 의상임을 확인 할 수 있으며, 그 의 생이 1907년에 마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헌자 료에 의하면 1905년 전후에 프록코트가 우리나라 에 선을 보였다고 하고 있으므로 당시 관직에 있던 사람들은 의복생활이 서양식으로 일부 변화되고 있 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3.Frock coat

    대한제국 당시 대례복은 영국식 궁중 정장예복 을 모방한 것이고, 소례복은 유럽에서 시민들이 예 복으로 입는 프록코트와 실크해트, 즉 연미복을 의 미하며, 일상복은 지금의 신사복 즉 유럽인의 평복 으로 세빌로 혹은 색 코트(sack coat)였다(Kum et al., 2002).

    서양에서는 19세기 초반 귀족사회의 사교모임에 서 남자예복으로 밤낮 구별 없이 테일코트(tail coat) 가 애용되었으며, 테일코트는 테일러드 칼라가 달 려있고, 뒷길에 달린 치마의 중심선이 갈라져 있는 테일(tail)이 있다는 특성에서 통칭하여 불렀던 이 름으로, 1810년대 더블브레스트(double breasted)에 4~6개의 단추가 달린 무릎길이의 프록코트가 등장 하면서 예복에 있어서 밤낮의 구별이 생겨 프록코 트는 낮의 예복으로 착용되고, 테일코트를 밤의 예 복으로 구별해서 입기 시작했다. 그 후 프록코트의 모양을 변형하여 앞자락을 잘라버린 것이 낮에 입 는 정예복인 모닝코트가 되었다고 한다(Ticon, 2006). 그러나 1860년대 경에는 일반적으로 프록코트, 조 끼, 바지가 같은 색으로 이루어진 슈트가 일상복 차림새였으며, 프록코트는 싱글 또는 더블브레스트 이며, 허리선까지 단추로 채우고, 몸에 꼭 맞으며, 후에 주로 검정색으로 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모닝 코트와 함께 예복으로 착용하였다(Kum et al., 2002). 1900년대 서양의 상류층 남성들은 때와 장소에 따 라 적절한 여러 벌의 의상이 필요하였다. 높이 세 운 칼라와 더블브레스트의 긴 프록코트는 모든 공 식적인 행사에 의례용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성 들의 일상 비즈니스용으로 착용되었다(Jung, 2000). 19세기를 통하여 가장 널리 입혀졌던 프록코트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등장과 함 께 그 착용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프록코트 는 연령이 높은 계층이나 의례적인 경우에 착용되 었다.

    Davis(1994)의 “Men’s Garments 1830~1900”에서 삽화나 사진으로 나타난 프록코트의 종류는 시대 에 따라 짧은 플레어 더블브레스트 프록코트, 턴다 운(turned down) 칼라의 싱글브레스트(single breasted) 프록코트, 실크 또는 벨벳의 넓은 칼라 프록코트, 풀스커트(full skirt)의 더블브레스트 프록코트, 더블 브레스트 프록코트, 풀스커트 프록코트, 싱글브레 스트 프록코트, 좁은 소매의 프록코트, 무릎길이로 라펠에 장식구멍이 있는 더블브레스트 프록코트, 허 리가 잘룩한 짧은 프록코트, 넓은 칼라와 라펠의 풀스커트 프록코트, 단추 4개의 더블브레스트 프록 코트, 넓은 소매통에 커프스가 좁아지는 프록코트, 더블브레스트 프록코트, 대퇴길이에 적당한 칼라와 라펠의 프록코트 등으로 다양하며, 모두 실크해트 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Fig .3,4

    대한제국기 당시 사진유물에서 단발령과 함께 대 례복, 소례복의 착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고종과 순종에 이어 고위관원들의 사진(Fig. 7)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고종의 실크해트에 프록 코트의 착용사진(Fig. 5)과 순종이 70여명의 신하와 더불어 양복차림으로 지방을 시찰한 것(Fig. 6) 등 은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Kum et al., 2002).

    박기종 프록코트는 1900년 문관복장규칙 제8조 의 상복일습(구제통상모, 구제통상의, 조끼, 바지)으 로 당시 유럽에서 통상적으로 착용하던 의복으로, 프록코트 일습이 대한제국시대에 착용되던 상복으 로 추측되며, 1907년에 개정된 ⌈문관복장규칙⌋ 제4 조 소례복 일습의 연미복과 프록코트 중 프록코트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유물은 상의인 프록코트 1점, 조끼 2점, 바지 1점으로 유물이 구성되어 있고, 모자 만 빠져 있으며, 나머지는 똑같은 구성을 하고 있다.

    1900 전후하여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한 젊은 이들이 돌아오고, 일진회 회원들이 양복을 착용하 면서 양복점이 생겼고, 양복이 전국적으로 확신되 었는데, 이들이 입은 양복은 거의가 색코트 수트 차 림이었으며, 1905년을 전후하여 프록코트가 선을 보 였고, 1910년경에는 프록코트에 실크해트와 스틱 을 갖추어 개화기 양복신사의 품위를 표현하였다 (Kim, 1990). 또 당시의 프록코트 착용 상황을 볼 수 있는 기록으로 1913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소설 ‘장한몽’에서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중배 가 프록코트에 단장을 짚고 금테안경에 금강석 반 지, 실크해트를 쓰고 가죽장갑에 에나멜 구두를 신 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당시에는 소위 일류인사의 복장이었던 것이다(Park, 1992). 그 러나 프록코트는 이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일상 복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Kim, 1990).

    III.Method

    본 연구에서는 부산박물관 소장의 박기종의 기증 유물 중 통상복 또는 소례복으로 당시 사용되었던 프록코트 일습 중 상의인 프록코트를 고찰하여 양 복의 도입기 당시의 프록코트의 형태와 특성파악 및 치수, 테일러링 등을 실증적 고찰을 하여 대한 제국기의 복식 복원 및 재현 등을 위한 기초 자료 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유물 실측은 1차로 2012년 1월에 의복구성학 전 공자 전문인 2명이 의복구성과 패턴제작 시 필요한 부위를 중심으로 줄자를 이용하여 각 부위별 2회 이상 계측하고, 그 평균치를 사용하였으며, 의복의 좌우 치수 중 오른쪽 치수를 기준치수로 이용하였 다. 그리고 자료 고찰에 부족한 부분들은 2015년 3 월에 추가 계측하고, 이들 계측된 치수들을 근거로 도식화 작업을 하였다. 본문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 은 사진은 직접 촬영한 자료이다.

    IV.Results and Discussion

    1.The period of wearing

    박기종(1839~1907)의 생존시기, 활동시기와 복 식사의 변천시기를 고려해볼 때, 연구대상인 프록 코트는 1900~1907년 사이에 착용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Kim(1990)이 1905년을 전후하여 프록코 트가 선을 보였고, 1910년경에는 프록코트에 실크 해트와 스틱을 갖추어 개화기 양복신사의 품위를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1905~1907 년경에 주로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Frock coat maker

    프록코트 안쪽 뒷목둘레에 <Fig. 8>과 같은 ASADA TAILOR라는 상표가 부착되어 있으며, 그 상표에는 경성이라는 글씨도 표기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복점에 대해서는 설이 일치하고 있지 않은데, Jung (2014)은 ‘서울에서 처음 문을 연 최초의 양복점은 1894년 오쿠다( ) 양복점으로 알려져 있다. 초창 기 양복점들은 대부분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이 운영을 독점하고 있었다. 정동 등 외국 인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에 자리 잡았던 초기 외 국인 양복점들은 조선에서 활동하던 외국인이나 개화된 조선 인사들이 애용하였다. 초기의 양복점 들은 신사복뿐만 아니라, 군복과 문무대례복 등 제 복을 제작하는 것에 주력하기도 했다’라고 밝히고 있고, Kim(1990)은 ‘맞춤양복점으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양복점으로 1889년 하마다양복점이 있고, 1896년 독립신문의 영문 광고에 Jusik Company 가 한국인에 의한 유일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We are the only Korean firm which make foreign······”). 그리고 1903년 한인양복점인 한흥양복점을 필두로 1905~1906년경에는 10여개의 한인양복점이 생겼 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당시에 양복점이 생겼다고 하는 것을 고 려해 볼 때 서울에 있던 양복점으로 생각된다. 그 리고 ASADA TAILOR에서 ASADA는 일본인 이름 으로 실제 일본인인지, 당시 일본 이름으로 개명한 한국인인지 정확하게 옷을 제작한 사람이 어느 나 라 사람인지 확인하기 어려우나, Jung(2014)이 밝 히고 있는 것처럼 1900년대 초 조선인의 기술로 양 복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당시 일본인의 양복점 에 종업원으로 일하던 조선인들이 그들에게 기술 을 배웠으며, 1910년 전후로 조선인이 운영하는 양 복점을 열었다고 하는 것 등을 고려할 때 서양 의 복의 도입이 빨랐던 일본인 양복점의 가능성이 더 높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3.Shape and character

    프록코트의 형태는 <Fig. 9>와 <Fig. 10>과 같이, 앞·뒤길이가 일반 슈트의 재킷보다 긴 무릎길이 정도이고, 피크드 라펠(picked lapel)에 더블브레스 트로 여며져 6개의 여밈용 단추가 2줄로 달려 있고, 2개의 장식 단추가 윗부분 좌우에 각각 달려있다. 이러한 프록코트의 형태는 <Fig. 5>의 고종, <Fig. 6>의 순종, <Fig. 7>의 고관들의 착용사진에도 비슷 한 형태를 나타내었다.

    1)Color and Material

    프록코트는 검은색 모직물로 제작되어져 있고, 라펠 부분에 검은색 골지의 실크 페이싱(facing)이 덧대어져 있다. 안감은 검은색 평직의 견직물(silk satin)과 청색 줄무늬가 있는 흰색 견직물로 구성되 어져 있고, 주머니 안감으로 갈색 면직물이 사용되 었다. 심지로 갈색의 캔버스심지가 앞길윗부분, 칼 라, 소매단 등에 사용되었는데, 낡아서 헤어진 앞길 안감과 바느질 일부분이 뜯어져 있는 안칼라 등에 서 심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서양복 수용 초 기의 양복지는 주로 수입품에 의존한 것으로, 모직 물은 1894년까지는 대부분 영국제였으며, 1895~1904 년까지는 일본제와 영국제가 절반씩 차지하였으며, 1905년 이후는 일본제품이 영국제품을 압도하였다고 한다(Kum et al., 2002). 박기종 프로코트의 소재는 시기적으로 일본제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Front bodice

    앞길은 허리선에서 상하 분리되어 앞길윗부분은 사이드웨이스트 다트가 좌우 각각 1개씩 있고, 더 블브레스트 부분은 앞 중심선에서 앞여밈분이 따로 구성되어 연결되어 있다. 이는 Davis(1994)의 Men’s Garments의 19세기 더블브레스트 프록코트의 패턴 (Fig. 11)과 비교해 보면 패턴에 없던 사이드웨이스 트 다트가 등장하여 앞길의 형태가 조금 다르며, 더블브레스트의 앞여밈분이 따로 분리되어 제작된 것은 19세기의 패턴과 같은 형태로, 이는 당시 모 직물이 생산되었지만 풍부한 소재가 아니었는지 옷감의 활용을 잘하기 위해 아껴서 제작하거나 또 는 디자인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는 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한제국은 일본의 서구 복식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입원단에 의존하였을 것을 고려해 볼 때 패턴을 따라하고, 옷감도 절약해서 의복을 제작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3)Back bodice

    뒷길윗부분은 암홀프린세스라인으로 사이드 바 디(side body)부분과 뒷중심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뒷중심부분은 허리선이 연결되어 길게 한 장으로, 좌우가 분리되어 뒷길중심 솔기선이 있으며, 왼쪽자 락이 오른쪽으로 넘어와 덮도록 뒤허리아래에 트임 이 있다. 프린세스라인으로 분리된 사이드 바디는 허리선이 분리되어 아래부분은 스커트로 되어 있다.

    4)Skirt

    앞·뒤길 아랫부분은 A라인 스커트 형태로 옆솔 기 없이 한 장으로 구성되었다. 뒷길의 사이드 바 디 프린세스라인 아래에서 뒷중심부분과 <Fig. 16> 과 같이 외주름처럼 연결되어져 있다. 그리고 프린 세스라인 허리위치에는 싸개단추(20mm)가 1개씩 장식으로 좌우에 각각 달려 있다.

    5)Sleeve

    소매는 두 장 소매로 소매트임은 <Fig. 12>와 같 이 외주름처럼 효과만 나타내고 있고, 트임입구는 <Fig. 20>과 같이 고정박음질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장식용 싸개단추(13mm) 2개가 달려 있다.

    6)Collar

    칼라는 라펠과 함께 피크드 라펠 형태를 하고 있 다. 겉칼라는 한 장으로 안칼라는 <Fig. 19>와 같이 뒤중심에서 좌우 연결되어져 있다.

    7)Lapel/Facing

    라펠부분은 검은색 골지의 실크 원단이 페이싱 으로 덧대어져 있다. 안단은 허리선 위치에서 상하 로 나누어져, 윗부분은 라펠안단이 따로 구성되고, 아랫부분은 스커트가 연장되어 안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8)Lining

    안감은 대부분 검은색 평직의 견직물을 사용하 고 있으며, 소매 안감은 <Fig. 13>과 같이 흰색에 청 색의 줄무늬가 있는 견직물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라펠에 덧 장식한 페이싱의 검은색 골지 실크가 <Fig. 14>와 같이 앞길윗부분에 사용되어졌다.

    9)Pocket

    뒷중심부분과 사이드 바디 프린세스라인 아래 스 커트가 연결되는 솔기 안쪽에 인심포켓(inseam poc- ket)이 좌우 각각 1개씩 달려 있다. 이 부위의 주머 니는 정말 예상하지 못하는 부분의 주머니 위치로 당시 착장 시 실루엣 상으로 주머니를 예측할 수 없는 곳에 남자들의 숨은 주머니와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앞길윗부분 좌 우 안쪽 가슴위치에 바운드포켓(bound pocket)이 각각 1개씩 달려 있다.

    10)Fastening

    더블브레스트 여밈으로 여밈용 단추 2개씩 3줄 과 장식용 단추 1줄로 되어 있다.

    좌우 모두 여밈용 단춧구멍 3개씩, 라펠부분에는 장식용 단춧구멍이 좌우 각각 2개씩 뚫어져 있다. Davis(1994)에 의하면 19세기 서양에서는 왼쪽 라 펠구멍에 꽃을 꽂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11)Connecting method of lining & upper

    안감의 가장자리는 겉감에 공그르기 바느질로 고정되어져 있다.

    4.Size

    앞길이 48.3cm, 등길이 47.2cm, 앞스커트 길이 53.5cm, 뒤스커트 길이 53cm, 옷길이 100.2cm, 스 커트 폭 74.5cm, 뒤품 36cm, 소매 길이 56cm/41.5cm 이며, 진동둘레 47.5cm, 라펠너비 8cm, 칼라 너비 8cm, 1/2뒷목둘레 7.7cm를 나타내었다(Fig. 15, Fig. 16).

    5Tailoring

    1. 앞길의 사이드웨이스트다트는 길이 13.5cm로 박음질 후 시접을 가름솔로 처리하였다.

    2. 어깨솔기선은 Davis(1994)의 19세기 후반 프 록코트의 패턴제도(Fig. 11)와 같이 뒤로 넘어가 앞 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어깨위치에서 뒤길 진동선 으로 6cm 정도 내려져 사선의 어깨솔기선을 하고, 시접은 가름솔 처리되어 있다.

    3. 앞길과 사이드 바디의 옆선솔기선도 위치가 뒤길 쪽으로 돌아 넘어가 앞에서는 솔기선이 보이 지 않으며, 뒤 중심선에서 14.5cm 정도 좌우로 들 어온 허리선에 위치하고, 시접은 가름솔로 처리되 어 있다.

    4. 위·아래가 연결된 허리선 부분은 시접이 가 름솔로 처리되어 있다. 사이드 바디아래부분은 앞·뒤가 옆솔기 없이 한 장으로 연결된 스커트로 구성 되고 뒷중심아래부분과 , 프린세스라인 아랫부분에 서 박음질되고, <Fig. 16>과 같이 외관상으로는 1.5 cm 크기의 외주름을 좌우 각각 한 개씩 만들고 있 어 박음질 솔기부위가 보이지 않고 시접은 스커트 부분으로 홑솔 처리되어 있다.

    5. 안단은 상하가 나뉘어져 두 개가 연결되어 구 성되어져 있다. 먼저 라펠안단 부분은 따로 재단하 여 박음질하고, 아래 스커트 부분은 스커트 앞 중 심을 연장하여 연결된 안단 형태이다. 앞길의 허리 선보다 라펠안단이 3cm 정도 길게 재단되어 스커 트의 안단위에 <Fig. 18>과 같이 새발뜨기로 고정하 면서 연결되어져 있다.

    6. 칼라는 캔버스 심지가 안에 들어있고, 스탠드 부분에는 긴 타원 형태로 4개의 동심원을 만들면서 심지고정을 위한 박음질이 <Fig. 19>, <Fig. 20>과 같 이 되어 있다.

      그리고 라펠에는 검은색 골지 실크 소재의 페이 싱을 덧 장식하기 위해 라펠 가장자리에서 4cm 정 도 들어온 위치에 공그르기로 덧붙여져 있으며, 이 장식용 검은색 골지 실크는 앞길윗부분 안감 전체 를 덮고 있다.

    7. 두 장 소매패턴으로 앞·뒷길의 진동 둘레보다 크게 재단되어 남은 소매 진동둘레의 여 유분으로 겨드랑이 아랫부분에 작은 맞주름을 잡 아 앞·뒷길의 진동둘레와 연결하였다. 이러한 소 매달기 구성방법은 최근의 서양복 구성에서 찾아 보기 힘든 구성법으로 소매산 부분에는 소매 오그 림이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Fig. 21>, <Fig. 22>와 같이 겨드랑이 부분에 맞주름이 있어 당시의 패턴제작이나 구성방법이 오늘날과 달라서인지 정 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당시 테일러링에서 사용되 었던 방법 중의 한가지로 나타났다.

      소매 수구 부분에는 <Fig. 12>, <Fig. 21>과 같이 10.5cm 올라온 위치에 캔버스심지를 박은 듯한 바 느질 자국이 있으며, 소매단 너비는 2.5cm이다. 이 당시에는 소매끝단 심지를 손바느질로 심지를 고 정하지 않고 재봉틀로 이렇게 박아서 고정하는 방 법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이는 당시 재 봉틀이 매우 귀한 기계이므로 재봉틀 박음질이 더 기술이 뛰어난 박음질이라 생각하고 처리한 구성방 법으로 보여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Men’s Garments” 에 나타난 19세기 남자 프록코트 소매의 커프스단 형식이나 절개된 장식단 형식이 변화되어 단지 장 식 박음선으로 남은 형태일 수도 있다.

    8. 단추 구멍은 좌우 모두 여밈용 단추 구멍이 <Fig. 23>과 같이 각각 3개씩 앞길윗부분에, 장식용 단추 구멍이 라펠부분에 사선으로 2개씩 뚫어져 있 고, 단춧구멍과 단추(20mm 크기)는 앞 중심선에서 5cm 떨어진 곳에 위치하도록 구성되어져 있다. 여 밈용 단춧구멍(Fig. 24)은 오늘날 재킷처럼 시작이 둥글면서 일자형태인 재킷단춧구멍이 수평으로 뚫 어져 있고, 장식용 단춧구멍(Fig. 25)은 일직선 형 태의 셔츠단춧구멍이 사선으로 뚫어져 있다.

    9. 사이드 바디의 프린세스라인은 시접이 가름솔 로 처리되어 있으며, 사이드 바디아래부분인 스커 트부분에서는 1.5cm 크기의 외주름처럼 구성되어 박음질되어 있으며, 프록코트 아랫단 위치에서는 주름이 들리지 않도록 <Fig. 16>과 같이 아래부분에 1.5cm 정도 고정되어져 있다.

    10. 트임 부분(vent)에는 두 자락이 갈 라져 찢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트임이 시작되 는 윗부분의 일정 부분을 <Fig. 16>, <Fig. 17>에 나 타낸 것 같이 손바느질로 고정상침하였으며, 뒤트 임 부분은 3cm 너비의 스커트를 연장한 안단으로 시접을 넣고, 트임 가장자리에서 2cm 들어간 곳에 안감이 공그르기로 고정되어져 있다.

    11. 프록코트의 칼라, 라펠, 앞여밈, 아랫단, 뒤 트임 가장자리는 모두 상침바느질이 되어 있다. <Fig. 25>

    12. 안감의 사이드 웨이스트다트 시접은 옆선 쪽 으로 홑솔 처리되어 있고, 안감 스커트부분은 상의 옆솔기선 위치에서 <Fig. 26>과 같이 외주름을 잡고 허리에서 4cm 정도 홈질로 주름을 고정하고 있다. 안감의 뒷중심부분은 겉감과 달리 허리선에서 위·아래가 분리되어 구성되어져 있다. 이는 실크 소재 를 절약해서 사용하거나, 뒤트임 부분의 바느질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 허리선을 분리한 것으로 보여 진다.

    13. 안감 좌우 가슴 부위에는 <Fig. 27>, <Fig. 29> 와 같이 안주머니가 만들어져 있으며, 바운드포켓 (16×1.8cm) 형태로 앞 가장자리에서 14.5cm 들어온 곳에서 시작된다. 주머니의 양쪽 가장자리는 서로 다른 모양으로 한쪽은 삼각형으로, 다른 한쪽은 사 각형 형태로 접어 박아져 있다. 주머니가 겹쳐지는 라펠 안단의 페이싱 실크는 주머니 가장자리 모양 으로 돌아가면서 공그르기 되어져 있다.

    14. 안감의 뒷아래 스커트부분의 프린세스라인 연결 솔기에 15cm 입구 크기의 인심포켓이 <Fig. 28>, <Fig. 29>와 같이 좌우에 만들어져 있고, 주머 니감은 갈색 면직물을 사용하였으며, 주머니감 안 쪽은 주머니감이 밖으로 밀려나오는 것을 고정하 기 위해 작은 홈질로 상침되어져 있다. 그리고 주 머니 입구에는 짧게 끝막음처리가 되어 있다.

    V.Conclusion

    개화기는 국내외 정세에 더욱 민감했던 시기였 기 때문에 주변정세 변화에 따라 짧은 시간 안에 복식변화의 폭도 컸던 때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에 서도 대한제국 시기에는 관복에 있어서 양복도입 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당시 생존하였던 박기종의 기증유물 중 상의인 프록코트의 특성을 실증적 고 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박기종은 칙임관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 으며, 그의 기증 유물 중 프록코트는 1900년 문관 복장규칙 제8조의 상복일습으로 착용되었던 당시 유럽에서 통상적으로 착용하던 의복으로, 1907년 에 개정된 ⌈문관복장규칙⌋ 제4조 소례복 일습의 연 미복과 프록코트 중 프록코트에 해당한다.

    2. 대한제국기의 당시의 프록코트를 착용한 사 진들과 박기종의 유물 프록코트를 살펴보면 19세 기 서양의 다양했던 프록코트 디자인 중 허리선이 분리되어 무릎길이의 A라인 스커트가 달린 형태로 피크드 라펠에 더블브레스트로 여밈용 단추와 장 식용 단추가 달려있는 형태 특성을 나타내었다.

    3. 본 연구에서 고찰된 프록코트는 1900년경 우리 나라에서 생기기 시작한 일본인이 경영하는 ASADA TAILOR에서 제작된 의복으로 생각되며, 의복소재 는 수입에 의존하였던 짙은 검은색의 모직물 겉감 과 검은색 평직의 견직물과 흰색에 청색의 줄무늬 가 있는 견직물 안감을 사용하고, 라펠장식용 검은 색 골지실크, 갈색 면직물 주머니감, 심지 등이었다.

    4. Men’s Garments의 19세기 프록코트의 패턴과 비교해 볼 때 차이점은 사이드웨이스트 다트가 생 겨나고, 소매단 부분 커프스 덧단 장식과 같은 것 이 없고, 소매단에서 일정한 크기만큼 올라온 곳에 장식 상침효과만 낸 것이며, 비숫한 점은 어깨선이 뒤로 많이 넘어가고 뒤 진동둘레선상으로 기울어 져 있으며, 더블브레스트 앞여밈분이 분리되어 구 성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5. 테일러링의 특징으로 소매진동둘레가 몸판진 동둘레보다 커서 겨드랑이부분에서 소매진동의 여 유분으로 맞주름을 잡아서 길과 연결하고, 사이드 바디 아래스커트의 연결은 솔기선이 표시나지 않 게 외주름을 잡고, 주름이 벌어지지 않도록 아랫단 에 고정상침을 하였으며, 칼라와 라펠, 앞여밈, 아 랫단, 뒤트임 가장자리에 상침바느질이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수입 모직물로 의복이 제작되어 옷감 을 절약한 구성법으로 앞중심선에 더블브레스트의 앞여밈분을 따로 연결하여 구성하거나, 앞 좌우안 단에서 라펠과 안단을 상하 분리하여 재단하고 구 성한 방법, 안감 뒷중심부분의 허리선 분리 구성법 등이 나타났다.

    6. 주머니는 가슴위치의 좌우안주머니 외에 특 별한 주머니가 스커트 뒷자락 좌우 연결 솔기선에 인심포켓이 있으며, 뒤자락 엉덩이부위의 주머니는 실제 착용하면서 사용하기는 매우 어려운 위치로 당시 남자들의 중요한 소지품들을 긴요하게 보관 하는 용도로 제작한 것이었다.

    본 연구에서 고찰된 결과는 박기종의 기증유물 중 프록코트 1점에 한정하여 고찰하였기 때문에 서 구식 소례복 프록코트를 총체적으로 보는 것에는 다소 미흡한 점도 있지만, 대한제국기 당시 소례복 으로 착용되었던 프록코트의 형태, 특성 및 구성법, 도식화의 제시 등으로 차후 프록코트의 복원 또는 재현을 하고자 할 때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향후 이 시기의 유물들이 더 추가되어 고 찰되어진다면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와 비교 분석을 통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연구로 패턴제작 실험 및 복식 재현 등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 된다. 또한 박기종의 유물 중 이번 연구에서 빠져있 는 조끼 2점에 대해서도 차후 고찰하고자 한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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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k Ki-Jong. From. Busan Metroipolitan City (2005).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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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k Ki-Jong & His Friends. From. National Place Museum of Korea (2010).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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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ck coat. From. Kum et al. (2002).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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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ck coat. From. Kum et al. (2002).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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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Jong’s frock coat. From. Kum et al. (2002).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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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Jong’s frock coat. From. Kum et al. (2002).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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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gh office’s frock coat. From. Kum et al. (2002).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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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emark on the n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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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ck coat fr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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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ck coat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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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ck coat pattern. From. Men’s garments (1994).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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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leeve vent & top st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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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leeve hem & l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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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ing sh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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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nt sh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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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ck sh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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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ck wa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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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pel & fac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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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der col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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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der collar sh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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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le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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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leeve armhole double -ple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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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nt button & buttonhole po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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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ilord button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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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itation buttonhole & bu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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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ing (right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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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und poc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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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seam poc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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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ing shape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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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pend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