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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6-0401(Print)
ISSN : 2383-6334(Online)
The Research Journal of the Costume Culture Vol.21 No.6 pp.844-859
DOI : https://doi.org/10.7741/rjcc.2013.21.6.844

1930년대~1980년대 호남 지방의 직물 생산 방식의 특징
- 전라남도 구례군의 면직물과 견직물을 중심으로 -

최 승 연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textile production of the Honam district from the 1930s to the 1980s - Focused on cotton and silk textiles in Gurye, Jella Province -

Seung yeun Choi
Dept. of Anthropolog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Received 31 July 2013, revised 27 November 2013, accepted 13 December 2013.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d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s of cotton and silk textile production in Honam district,especially in Gurye, Jella Province from the 1930s to the 1980s. To do this, research method in this study wasboth literature and fieldwork research and results were as follows. First, in terms of cotton fiber cultivation ofGurye, Chinese Cotton(在來綿) has been substituted for America Cotton(陸地綿) and additionally, Yellow Cotton(黃綿) has been cultivated in the 1930s. Also, in terms of silk fiber cultivation of Gurye, Joseon Silkworm hasbeen substituted for Japanese Silkworm by inflowing the Japanese mulberry tree. Second, in terms of spinningmethod, cotton spinning has been conducted at every house by an individual tool from the 1930s to the 1950s andhas been gradually changed to mechanization by market shop equipped with mechanized cotton gin and cottonwhipping tool. However, there have been no changes in silk spinning method from the 1930s to the 1980s. Third,loom type has been changed from the traditional Korean back-strap loom to the treadle loom between the 1930sand the 1940s. Fourth, dyeing was conducted by chemical dyestuff after weaving. The circulation of textile wasdone through the joint market by Japan in the 1930s~1950s and has changed to the market sales by producers sincethe 1950s. Fifth, since the 1970s, the outputs of cotton and silk textile of Gurye have been reduced. This wasconnected with the westernization and the inflow of the synthetic fiber and cloth in cotton and was related to thechanges of the nation policy and silk fiber inflow from the china to the Korean farm villages.

0068-01-0021-0006-4.pdf520.8KB

I. Introduction

 현재 한국에서 잘 알려진 전통 직물 생산지는 한산 모시, 안동 삼베, 나주 샛골나이, 곡성 돌실나이, 보성 삼베 등으로, 일반 사람들은 과거에 이들 지역들에서만 직물이 생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8, 19세기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조선 전국 8도의 각 지역들이 각각 고유한 자연적, 역사적 전통 안에서 면직물, 마직물(대마, 저마), 견직물 생산지역들이 형성되었었던 사실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전라남도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섬진강유역(곡성, 구례, 순천, 고흥), 영산강 유역(담양, 장성, 영광, 나주, 화순, 무안, 영암) 그리고 탐진강 유역(장흥)의 세 지역들은 위에 언급한 문헌들에서 조선시대부터 면, 마, 견직물의 주요 생산지들이었다. 이들 지역들의 이와 같은 생산 전통은 1970년 대 이후 농촌 직물 수공업이 사라지는 시점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개항기 이후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일본이 원료 공급지로서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여러 정책들 가운데는 전통 직물 수공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일제 강점기는 한국의 지역별 농촌 직물 수공업의 섬유 재배에서 제사, 제직, 염색에 해당하는 전 생산과정의 기술과 도구, 노동방식, 유통 등에 있어 큰 변화가 있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이후 해방, 6.25전쟁, 그리고 급속한 산업화 과정이라는 시기 동안에도 한국의 직물 문화는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중심 지역의 주변부에 속하는 지방의 직물 문화의 변화 과정은 유명한 직물 생산지들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는 묻혀있는 역사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호남 지역에서는 나주, 보성, 곡성 등을 제외한 다른 지역들도 고유한 생태, 역사, 사회문화적인 전통 안에서 고유한 직물 문화가 존재해 왔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와 같은 지역들의 직물 문화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한국 각 지역의 직물 생산 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었는가, 어떤 변화의 과정을 겪어왔는가의 문제는 근대 이후 한국 직물 문화의 특징 및 한국의 지역권별 직물 문화를 비교할 수 있는 실증적인 자료의 축적을 유도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라는 한국 역사의 중요한 시기인 1930년대~1980년의 시기동안 호남 지방의 직물 문화의 특징과 그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현재 돌실나이 삼베로 잘 알려진 곡성군의 접경 지역이면서 곡성과 비교될 만큼 면, 마(삼베), 견직물 생산이 활발하였지만, 현재까지 직물 생산 문화에 관련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구례군의 직물 생산 방식의 특징과 변화 양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II. Review of Litera

 현재까지 일제 강점기부터 근대화 되는 시기까지 한국 지방의 직물 문화에 관한 연구들은 전통직물 생산 과정의 재현 및 현황을 조사한 연구와 현대적 응용 연구로 세분화된다. 먼저 전통 수직이 남아있는 곳의 생산 과정과 현황을 조사한 연구로서 안동, 곡성, 한산, 나주의 전통 직기 및 생산 방식을 조사한 Ku(1985)와 Jung(1983)의 연구가 있으나, 이들 연구들은 네 지역의 전통 직기, 직조 과정등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개별 지역들의 직물 문화에 관한 연구들이 많았는데, 나주 샛골나이의 경우 나주의 전통적인 면생산 과정을 영상 기록한 연구들(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2004; Sim, 2003)과 면재배에 적합한 샛골나이의 기후, 토질 등 자연 환경을 근거로 면 재배, 제사, 제직 과정에 관한 연구(Sung, 1984)가 있었다. 의령, 동복 삼베는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삼베 생산 현황 및 생산 과정에 관한 연구(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1994)만이 있었다. 돌실나이 삼베로 유명한 곡성의 경우도 나주 샛골나이와 마찬가지로 문화재 관리국에 의한 전통 직물 생산 방식의 역사, 재현 및 영상 기록물 연구(Suk, 1969)만이 있을 뿐이다. 보성 삼베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직물 생산 방식의 재현에만 한정되지 않고 전통시기부터 현대까지 삼베 생산 과정의 변화 양상과 생산 단절 위기에 대해 진단한 연구들(Go, 2004; Lee, 2012)이라는 점에서 기존 연구들과 차이를 보였다. 안동 삼베는 다른 지역들보다 연구주제가 다양하였다. 즉, 전통적인 안동 삼베 생산방식에 대한 연구(Kim, 1980)이외에도 문헌과 현지조사를 기반으로 역사, 섬유학적 특징, 생산 방식, 현대적 변화 및 응용 등 안동 삼베에 관한 다양한 주제의 연구들(Andong National University museum, 2002)도 이루어졌다. 한산 모시 역시 문화재 관리국의 주도하에 한산 모시 생산 방식을 재현하는 연구(Kwon, 2004; Sim, 2011), 한국 모시의 역사 안에서 한산 모시의 전통을 평가한 연구들(Kim & Cho, 2000)이 있었다. 지방 특산 직물의 현대적 응용 연구로서는 주로 한산모시에 관한 연구들에 집중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한산 모시의 섬유학적 특징에 관한 연구(Kim, 1998; Ryu & Hong, 1997; Hong, 1997), 한산 모시의 감성 이미지와 선호도에 관한 연구(Kim, 2005), 한산 모시를 응용한 작품 제작 및 개발(Yoo, 2007, 2010, 2013; Hong, 2009), 한산 모시 활성화를 위한 연구(Kim, 1998; Lee, 2006)등이 있다. 또한 지방의 직물 문화에 관한 연구들은 의류학 분야 이외에도 민속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경제학 그리고 지리학 분야에서 연구되었다. 그러나 의류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 분야에서 근대의 지방 직물 문화에 관한 연구들의 공통점은 현재 직물 생산지로 유명한 지역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전통 직물 생산지들의 생산 방식에 관한 연구들은 몇 개의 연구들을 제외하고는 유명한 직물 생산지들의 직물 생산 방식을 복원과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현재라는 시간에 초점을 두고있다. 따라서 시간의 차원을 고려하여 사회변화와 함께 직물 생산 문화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본 연구에서는 기존 한국 직물 연구에서 거의 연구되지 않았던 지역들의 직물 생산 문화의 특징과 시간에 따른 변화 연구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기반에서 본 연구는 1930년대~1980년대의 전라남도 구례군의 면직물과 견직물의 직물생산 방식의 특징과 변화 양상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본 연구의 구례군 면담자들은 이 지역의 70~90세 이상의 장수노인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문헌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일제 강점기 시기부터 마을의 직물 생산과 관련된 구체적인 상황과 변화 과정들에 관한 중요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III. Method

1. Objectives of the study

 연구모형: 본 연구 대상인 직물은 경사와 위사가 교차하여 조직을 형성하는 것으로 하나의 직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섬유 재배, 실을 만드는 제사(製絲), 제직(製織), 염색(染色)의 생산 영역이 존재한다. 또한 다양한 맥락에서 직물을 유통, 교환, 사용하는 영역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직물 안에는 인간을 포함한 주변 환경과 상호 작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다양한 문화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직물이 생산, 유통, 사용되는 각 과정들은 하나의 체계(system)로서, 해당 사회 인간의 문화를 함축하고 있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직물 문화는 해당 지역의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Sibley & Jakes, 1989).

 연구문제 1: 체계를 이루고 있는 직물 생산 단위를 섬유의 종류(면과 견)에 따라 섬유 재배, 제사, 제직, 염색, 유통 영역으로 세분화하여 구례군 지역의 독특한 직물 문화의 특징을 파악하고자 한다.

 연구문제 2: 연구문제 1의 세부 영역들이 일제강점기, 해방 후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 과정을 보이는가를 파악하고자 한다.

2. Research method

 연구방법은 문헌조사와 현지조사의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문헌조사는 구례의 역사와 문화, 자연 환경과 생업 방식, 전통 직물 생산에 관한 기록이 제시되어 있는 고문헌, 구례 군지(郡誌), 구례 군사(郡史), 향토 문화 사료집, 구례에 관한 역사서, 구례군 통계 연보,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발간한 구례군 조사 자료, 한국 국가 기록원 소장의 조선 총독부가 발행한 직물류에 대한 시험 성적표기록 등을 조사 자료로 활용하였다. 현지조사는 1차 조사로 2010년 6월 19일부터 6월 25일까지, 2차 보완 조사는 2012년 11월 25일부터 2012년 12월 10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지역은 구례의 1개읍(구례읍) 7개면(용방면, 광의면, 산동면, 마산면, 토지면, 문척면, 간전면)의 모든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3. Data collection

 면담 대상자는 구례의 1개읍 7개면 각 마을에서 1930년대(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직물 생산과 관련된 경험이나 기억을 지닌 연령대의 주민들(면담자 인적사항은 본 논문 참고문헌 뒤에 첨부하였음)을 대상으로 하였다. 추가적으로 이들의 며느리, 아들들이 면담대상자들에 포함되어 자신들의 시어머니,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자료를 제시해 주었다. 조사 기간 중에 이들 면담자들을 통해 구례군의 직물 문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진 자료들도 얻을 수 있었다. 문헌조사 자료와 현지조사에 의해 수집된 자료(구술자료와 사진자료)들은 종합적으로 분석되어, 본 연구의 내용으로 제시되었다.

IV. Results & Discussion

1. Gurye's textile culture appeared in the literature

 구례는 삼한시대에는 고랍국(古臘國), 백제시대에는 구차례현(仇次禮縣), 신라 경덕왕대는 구례현(九禮縣)으로 불렸고, 통일신라시대에 현재의 구례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례의 직물 문화에 관해 현재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의 상한 연대는 조선시대이다. 구례는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뽕나무 재배를 포함한 양잠, 대마와 면직물 생산지였다. 또한 조선시대부터 지주회(地主會)가 있어, 면작조합(棉作組合), 연초조합(煙草組合), 잠업계(蠶業契) 등의 단체를 조직, 운영(Gurye Cultural Institute, 2009)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소수의 문헌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부터 구례의 토질에 적합한 섬유 재료로서 양잠, 대마, 목면이 생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1930년대 구례에서는 섬유 작물 역시 특용작물로서 분류되어 목화(육지면), 대마, 춘잠견과 추잠견의 양잠이 생산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목화 554,538근, 아편초(煙草) 33,588관, 삼(대마)이 4,454관, 모시 167관, 왕골 1,258관과 양잠으로서 춘잠견(春蠶繭) 218석(石)과 추잠견(秋蠶繭) 60석(石) 정도가 생산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Jeollanam-do, 1987).

2. Fiber cultivation & spinning process

1) Cotton
(1) Fiber cultivation

 1930년대 구례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신의 소유 혹은 소작을 하는 밭에서 목화를 재배하였다. 1930년대 구례에 관한 기억을 간직한 거의 모든 여성 노인들은 그 당시 아이들과 남편 옷 장만을 위한 자가(自家) 소비 혹은 장에 가서 팔아 현금을 마련하거나,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기 위해 직접 목화를 재배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대부분 면을 직접 재배하였으나, 특별한 경우 면을 직접 재배하지 않고 면실을 구매하여 직조만을 하였다. 그 첫 번째 경우가 자신 소유의 밭도 없고, 소작할 경제적 여유도 없는 농가에서는 목화 재배를 하지 않고 대신에 목화를 수확한 토지 주인의 면실을 받아다가 면 직조를 한 경우였다. 이 경우는 면실의 양을 원래 밭 주인과 나누는 것으로 구례에서는 이것을 “수냇베 길쌈” 혹은 “피냇베”(이춘님, 1920년생, 간전면)라는 용어로도 표현하고 있었다. 면실만을 구매하는 두 번째의 경우는 구례의 산악 지역 거주민들의 경우(김석두, 1915년생, 토지면)이다. 구례의 북쪽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산에서는 목화 재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명 평야 지대라고 표현되는 농사를 짓는 구례의 다른 마을이나 5일장에서 면실을 구매하여 제사 과정 없이 직조만 하였다.

 1930년대 구례의 면화 품종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유입한 육지면이었다. 구례 역시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재래면을 재배하였고, 일본인들에 의해 재래면이 육지면 종자로 강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Mun, 2005). 또한 구례군의 면 재배에 있어 특이점은 육지면 이외도 황면(黃綿)(일명 노랑 미영)이 재배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목화의 종류는 크게, 고려시대 문익점(1360년대)이 원나라에서 들여온 재래면과 노랑 미영이라고 불리는 다갈색의 ‘황면(黃綿)’,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일본이 한국에 강제로 이식한 육지면의 세 종류이다(Gwangju Folk Museum, 2009). 육지면 종류 이외에 노랑 미영이라고 하는 황면은 ‘황목(黃木)’ 또는 ‘반목(班木)’이라고 불렀는데, 황면은 목화솜이 다갈색을 띠는 종으로, 재래면 재배가 불가능했던 함경도 등에서 재배되던 목화 품종이었다. 노랑 미영은 1950년대까지 남부지역에서도 드물게 재배가 되었고, 흰 목화에 변화를 주기 위해 흰 면직물과 교직(交織)으로 직조되기도 하였지만, 수확량이 적고 섬유가 짧고 질기지 못해 많이 재배되지는 않았던 목화 품종이었다(Gwangju Folk Museum, 2009). 구례군에서 황면의 경우는 면담자(황례순, 1916년생, 문척면)가 외관의 색상으로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재래면과 육지면의 구별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황면은 잘 구별하였다. 그러나 구례에서 황면의 경우도 많이 키우거나 오랫동안 직조했다는 면담자들은 매우 드물었고, 한 때 재배해서 직조했었다는 정도로 생산량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기 구례군 목화 재배 방식은 재래면에서 대체된 육지면 그리고 황면의 두 가지 종류가 재배되었고, 섬유 재배 방식은 대부분 자신이 직접재배하였다. 그러나 동일한 구례 지역 안에서도 경제 수준에 따라 수냇베, 산악 지대 거주민들은 섬유 재배는 하지 않고, 시장에서 구매하는 등 동일한 구례 지역 안에서도 면섬유를 얻는 방식은 계층적, 거주 환경에 의해 차이를 보였다.

(2) Spinning

 면의 제사 과정은 실잣기라고도 하는데, 이 과정은 구체적으로 씨앗기(繰綿), 솜타기(打綿), 고치말기 과정으로 세분화된다. 면제사의 첫 단계인 씨앗기(혹은 조면과정)는 수확한 목화의 씨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구례 주민들의 면담 결과, 1930년대 구례에서 면의 씨앗기 과정에 한국의 전통 조면기(繰綿機)인 씨아틀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Fig. 1의 왼쪽 사진). 조면기인 씨아틀은 조선시대 세조(世祖)가 농업학교를 각 도에 설치하고, 구례를 포함한 각 지역들에 조면기, 소사기(繅絲機, 고치의 실을 켜는 물레) 등을 보급(Gurye Hyanggyo, 1962)하면서 구례 지역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다. 1930년대~1950년대까지 면직물을 생산하는 구례군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면 제사의 전 과정이 분업이나 공동 작업이 아닌 개별 가정에서 개인 소유의 제사도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면담 결과(한필남, 1917년생, 산동면), 제사 과정에 핵심적인 씨앗기의 씨아 가락은 주로 시장에서 구매하였다. 나무틀이나 솜을 타는 활대(Fig. 2의 왼쪽 사진)는 거의 대부분 집안의 남자들이 만들거나 목수에게 돈을 주고 맡기는 형태로 사용하였다.

<Fig. 1> Change in cotton gin

<Fig. 2> Change in cotton whipping

 그러나 1910년에 설립한 경성직유주식회사 가그 이듬해 직기 74대로 공장을 가동시키면서 상인들에 의해 농촌 지역들에 일명 족답식 조면기인 일본제 발틀 조면기(Fig. 1의 오른쪽 사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구례군에서는 가정에서 전통적인 씨아틀과 활대를 사용하여 조면과 솜 타는 과정이 모두 이루어지다가 1940년대~1950년대에 발로 밟는 족답식 조면기가 도입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면담(김석두, 1915년생, 토지면; 윤재식, 1937년생, 용방면; 조정란, 1932년생, 산동면)을 통해 확인되었는데, 족답식 조면기는 각 가정에서 개인이 소유한 것이 아닌 큰 시장에 “씨앗이방”이라는 상점에 보급되었다. 씨앗이방에서는 발틀 조면기, 솜타는 기계(Fig. 2의 오른쪽 사진)까지 갖추고 돈을 받고 씨 빼고 솜까지 만들어 주었다. 씨앗이 방에서 조면작업과 솜 타는 과정이 끝난 면솜을 가져와서 물레 작업과 직조는 개별 집에서 행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 씨앗이 방에서는 재래식 솜 타는 도구와 방식이 아닌 기계화된 솜 타는 도구와 방식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해방과 6.25 전쟁이후에는 전문적으로 도정과 조면, 타면 작업을 해주는 씨앗이방의 명칭과 기능은 사라지고, 정미소의 성격으로 변화하였다(Jeollanam-do, 1987). 그러나 해방 이후의 일부 방앗간에서는 여전히 씨앗이 방과 같은 조면과 타면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Jeollanam-do, 1987). 이와 같은 면 제사 방식은 해방 이후 구례군에서 1970년대 이후 면직물 생산이 사라지게 된 시점까지 지속된 것으로 파악된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농촌 직물업은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은 면사가 대량으로 유입되어 농촌 지역에서 일본산 면사를 구입하여 직조만을 하는 방식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전통 직물업은 방적 부문의 기술발달이나 기계화는 지체되고 직조 부분만 발달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견해(Kwon, 1989)가 있다. 그러나 현지조사 결과, 구례 지역에서는 일본산 면실만을 구입해서 제사과정은 생략하고, 제직만 하는 방식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종래 일본산 면사의 농촌 유입에 의해 제사와 제직과정이 분리되어 한국 농촌 직물업이 기형적으로 발달했다는 일반적인 견해는 구례군의 면직물 생산 방식에서는 파악되지 않았다. 즉, 산악지대 거주민 혹은 자신 소유의 토지가 없는 경우만 제사와 제직이 분리(면사를 구례 다른 지역에서 구매)되는 소수의 사례가 확인되고 있었다. 씨앗이 방의 도입으로 조면과 솜 타는 과정만 개별 가정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면솜을 가지고 와서 집에서 직조는 하였기 때문에 면 재배, 제사, 제직까지 이어지는 생산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구례군에서 1930년대부터 1970년대 이후 면직물 제직이 사라지게 된 시점까지 면직물 생산은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고, 면제사와 면제직은 함께 이루어지는 생산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Silk
(1) Change of mulberry tree & silkworm

 1920년대~1930년대 구례는 산악지대가 발달된 자연 환경적 특징으로 인근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구지뽕 나무가 많았다. 구례 사람들은 이 구지뽕나무를 먹여 집에서 누에를 길렀으며(이춘님, 1920년생, 간전면; 이옥남, 1918년생, 간전면), 양잠업의 분포는 구례 전군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구례에서 기르는 전통적인 누에 품종(일명 조선누에)은 품종이 열등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조선누에를 왜누에라는 개량종으로 전환하여 양잠 생산량 증가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제 강점기 구례군에 관한 문헌 기록(Gurye Cultural Institute, 2004)과 구례 주민들의 구술에 의해 동시에 확인되고 있다. 황례순(1916년생, 문척면)은 14살 때(1930년대)부터 직조를 했고, 산에 야생하는 구지뽕 잎을 가져와서 조선누에를 기르다가 일제 강점기 왜누에가 들어와서 춘잠과 추잠을 키웠다고 하였다. 김석두(1915년생, 토지면)에 의하면 누에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산에서 산뽕나무를 가져다가 화개장터에서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일본인들이 왜뽕나무라는 묘목을 한국 농민들에게 팔았고, 그것을 키워서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주민들 중에는 왜뽕나무를 계속 재배한 사람도 있었고, 조선 산뽕나무를 계속 재배한 사람도 있었다. 왜누에는 잠을 자는 누에의 크기가 커지고, 고치집을 짓기 위해 많이 먹는 기간이 일주일 정도 필요한데, 이 시기에 뽕잎이 많이 필요하고 뽕나무를 많이 먹여 누에가 크게 자란다. 그리고 고치가 클수록 면사무소에서 실시하는 일본인들의 공판에서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마을의 부녀자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뽕나무를 따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또한 일제 당국은 기존의 산뽕나무와 왜뽕나무를 섞어서 먹일경우, 누에고치의 품종이 좋지 않다고 하여 왜누에에 뽕나무 종류를 혼합해서 주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 정부에 의해 1952~1956년 그리고 1959~1963년 2차례의 “5개년 잠견증산계획”이 실시되었지만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장기적인 잠업 증산 계획으로서 1962~1966년(제 1차 증산계획)에 상전(桑田)의 확대로 누에고치 생산량이 증가되었다(Ministry of Agriculture and Forestry Agriculture Management Institute, 1971). 2차 증산계획(1967~1972년)은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국고 지원이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의 잠업증산 정책의 분위기에 의해 구례군도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까지는 양잠 재배가 활성화되고, 구례군 농가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2) Spinning

 일반적인 견 제사 과정은 다른 섬유류인 면이나 삼베의 제사 공정, 작업 시간과 도구와 비교할 때 가장 간단하다. 일제 강점기 조선 누에가 왜누에로 그리고 뽕나무 종자로 변화는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전, 후로 견 제사의 기술적 과정이나 도구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요한 이유는 견의 경우, 일본인들의 공동판매의 대상이 된 것은 견사와 견직물이 아닌 누에고치 자체의 수매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의 주 관심은 왜누에 품종 보급과 뽕나무 밭 육성 및 확대에 의한 누에고치 생산량 증가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견 제사과정은 끓는 물이 있는 솥에 누에고치를 넣고, 젓가락으로 실 끝을 찾아 여러개를 한 번에 물레에 돌려내면 실이 만들어지는 비교적 간단한 공정이다. 구례 제보자들(윤재식, 1937년생, 용방면; 양기례, 1918년생, 산동면; 한필남, 1917년생, 산동면; 조정란, 1932년생, 산동면)의 면담결과, 해방 후에도 이와 같은 전통적인 방식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일반적인 견 제사과정에는 명주 물레, 자새, 솥, 젓가락 등이 필요한데, 구례에서는 이와 같은 도구들을 정식으로 모두 사용하지 않고, 부엌에서 밥이나 음식을 하는 솥을 이용하였다고 했다. 또한 명주 물레를 별도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인 면이나 삼베를 실로 만들 때 사용하는 물레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3. Weaving of cotton & silk

1) From the back-strap loom to the treadle loom

 구례군에서 제사 과정이 끝난 면사와 견사를 직조를 위해 베날고 바디에 날실을 꿰고 베 매고 틀에 올려서 제직하는 과정은 한국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직조 준비나 직조 과정과 동일했다. 단, 1930년대부터 해방 후 근대화되는 과정 동안 직조 준비과정과 직조 과정이 아닌 직기의 종류에는 변화가 있었다. 구례 지역 직기의 변화 과정은 소위 조선베틀 혹은 손베틀에서 기계 베틀이라고 부르는 족답식 직기로의 이행이었다. 구례에서 손베틀 혹은 조선 베틀이라고 부르는 직기는 기대를 갖춘 한국의 전통적인 요기(腰機)(Fig. 3의 왼쪽 사진)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기계 베틀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베틀을 개량한 개량 직기와 직기의 부속품으로서 발로 밟는 식(족답식)의 종광 조작 장치가 달린 직기(Fig. 3의 오른쪽 사진)를 모두 지칭하는데, 구례에서 기계 베틀은 족답식 직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사애(1916년생, 토지면)는 “친정이 부자여서 18살 시집 올 때도 친정에서 기계베로 명베, 삼베를 하루에 한 필 더 짰고 시집도 그 당시 부자여서 기계베틀이 있었어.”라고 했다. 이옥순(1914년생, 토지면)은 “17살에 와서 시집와서 명베 5새, 7새 하고 … 잘 짠 사람은 하루에 한필, 못 짠 사람은 며칠 걸려서 짜고 조선베틀도 집에 있고, 기계 베틀로도 하고….” 유삼순(1916년생, 마산면)은 “친정이 부잣집 유씨 가문이 큰집인디, 시집올 때 기계 베틀이 시집에 있었어.”라며 부잣집으로 시집을 와서 당시 기계 베틀을 사용했다고 하였다.

<Fig. 3> Traditional back-strap loom & treadle loom

 위의 구술 내용처럼, 구례에서는 1930년대부터 1970, 1980년대 마을에서 직조를 그만 두게 된 시기까지 대부분의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는 조선 베틀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가정에서는 족답식의 성능이 좋은 기계 베틀로 하루에 한 필 이상의 직물을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구례군에 1930년대~1940년대 기계 베틀이 어떤 경로를 통해 유입되었는가는 일본 식민지 정부의 한국에 대한 직물 산업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식민지 지배 초기 총독부는 한국의 도시와 농촌 지역에 근대적 직물생산 도구를 보급하고자 했고, 1930년대에는 개량직기와 족답기의 보급 노력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일제는 1907년 한국에 일본식 농업과 직조 기술을 전파하는 기관으로서 권업모범장과 공업전습소를 설치하고, 공업전습소의 수료생들에게 개량직기가 보급되었다. 또한 각 지방에 관의 장려에 의해 산업 조합이 결성되고, 이 안에 직물취급조합이 조직된다. 이 산업조합은 농민들을 조합원으로 가입하게 하여 직물 생산품의 판매와 개량 직기와 같은 도구를 보급하고, 직물 생산품에 대한 품질검사(Kwon, 1989)를 실시하게 된다.

 따라서 1930년대~1940년대 구례군의 족답식 직기의 유입은 가내 부업적으로 직물을 생산하는 농민들 개인에 의한 구입보다는 직물 품질의 개량, 증산 장려를 위한 일제 식민 당국의 노력의 과정에서 나타난 산업조합에 의해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반 농가에서는 기존의 조선 베틀을 그대로 사용하고, 직조의 편리함과 생산량 향상의 이점으로 인해 부유한 농가에서는 족답식 직기를 구입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구례에서 직조된 직물의 종류는 조사결과, 그것이 조선베틀이든 기계 베틀이든 모두 면, 삼베, 견의 평직물 만을 직조하였고, 문양직물을 직조한 경우는 한 개의 사례도 확인되지 않았다.

2) Density
(1) Cotton

 구례에서 직조된 면직물의 최대 승수는 15새로, 보통 10새 이상인 12, 15새는 일반 사람들보다 직조 솜씨가 매우 좋거나 전문성을 가진 할머니들에 의해서 생산되었다. 가정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는 주로 5새, 6새, 7새 면직물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그 이상의 승수는 좀 더 특별한 목적이나 상품용 판매를 위해 직조되었다. 구례군 제보자들을 통해 확인된 직물의 제직 승수와 관련된 특이한 점은 직물의 섬세도를 나타내는 단위이면서 한 폭의 경사 80올을 의미하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새” 혹은 “승”의 단위 이외에도 “조시”, “저시” 혹은 “걸이”라는 직물의 섬세도 단위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시, 저시, 걸이는 모두 경사 20올을 의미하는 동일한 의미의 용어였다. 직물의 제직 승수에는 5새와 6새 이외에도 “닷새 두 번 걸이” 혹은 “닷새 두 번 저시”(예를 들어 “닷새 두 번 걸이” 혹은 “닷새 두 번 저시”는 5(새)×80올+20올(한 번 걸이)+20올(한 번 걸이)=440올을 지칭하는 직물의 섬세도 단위로서, 승과 새 이외의 직물의 섬세도를 지칭하는 단위였다.)와 같은 직물의 섬세도를 지칭하는 수량 척도를 사용하였다. 하루에 보통 한 필(20자)을 직조하였지만, 직조 기술이 서툰 할머니는 하루에 면직물 한 필을 모두 직조하지는 못하였다. 간혹 기계 베틀을 소유한 할머니들은 하루에 한 필 이상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2) Silk

 견직물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다른 섬유류와 비교할 때 실을 만드는 제사 과정은 간단하지만, 실이 가늘어 제직 공정은 다른 섬유류에 비해 기술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숙련된 직조를 할 수 있는 할머니들이라고 해도 하루에 한 필을 생산할 수 없고, 2~3일 혹은 기술이 서툰 사람들은 한 필 제직에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보인다. 견은 실이 가늘기 때문에, 견직물의 일반적인 제직 승수는 가장 굵은 것이 10새, 보통이 12~13새, 15새 정도가 상품이라고 평가되고 있었다. 면직물보다는 높은 승수가 제직되었는데, 7새, 8새, 9새가 보통이고, 10새 이상의 경우도 많이 제직한 것으로 보인다.

4. Dyeing

 구례군의 면직물과 견직물의 염색은 모두 후염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시장에 판매하는 면, 견직물들은 제직 후 거의 염색을 하지 않고 그대로의 색으로 판매하였다. 특히 견직물은 면직물과는 다르게 고급 직물류에 속했기 때문에 집에서 특별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도 거의 염색을 하지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이옥순(1914년생, 토지면)은 “명베 나갔고 검은 물 했제, 장에서 검은 물 사오제….” 황례순(1916년생, 문척면)은 “시장에서 검은물하고 빨간 물 사 와서 했어.”라고 구술하고 있듯이 염색을 한 경우는 대부분 집에서 아이들의 치마 혹은 저고리용 면직물이었다. 1930년대~1940년대 천연 염색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시장에서 검은색과 빨간색 화학 염료를 구입하여 염색을 하였다.

 이와 같은 화학 염료는 1890년대 이후 개항과 함께 일본제 광목과 염료가 한국에 들어왔고, 이 제품들이 전국의 시장으로 유통되면서 지방의 시장까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직물에 화학 염색을 해서 옷을 해 입는 방식은 1960년대~1970년대 시장에 몸빼 혹은 화학염색을 한 기성 의류 제품이 만들어져 나온 이후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5. Circulation of cotton & silk

 일제 강점기 이전, 구례에서 생산된 직물의 유통방식은 농민들이 5일 시장의 베전에 판매를 하였다. 이 상품들은 전국의 장시를 돌아다니는 보부상들 혹은 객주에 의해 전국의 다른 지역으로 유통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동안 농민들에 의해 생산된 직물의 판매와 유통은 그 이전의 자유매매와 판매 방식과는 다르게 일제 당국에 의해 통제되었다. 즉, 일제는 전통적인 한국 누에고치의 품종을 일본식으로 개량한 이후 생산된 견사에 대해 품질 검사를 실시한다. 1935년과 1937년 조선총독부의 제사성적원부(製絲成績原簿) 기록(National Archives of Korea, 1935; 1937)에는 전국의 누에고치를 포함하여 전라남도의 다른 지역들과 구례에서 생산된 누에고치 실의 다양한 특성과 품질, 평가에 관한 기록들이 제시되어 있다. 직물의 품질 검사와 함께 면이나 견의 판매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이른바 “공동판매제(일명 “공판제”)라는 방식이다. 공동판매제는 일본이 각 농촌지역에 만든 산업조합을 통해 농민들이 생산한 목화솜, 누에고치, 직물류에 대한 독점적인 매수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공동판매제 방식에서는 농민들이 군에서 지정한 판매 장소에서 농민들이 생산한 목화솜, 누에고치, 직물류를 등급 판정을 받고, 판정 받은 등급 가격으로 일괄적으로 판매하는 방식이다.

 식민당국의 공동판매제는 생산자와 상인 사이를 완전하게 통제함으로써 식민당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판매와 유통을 유도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농민들에게 일괄적으로 수매한 면화와 누에고치는 대부분 지정 매수인인 일본인 소유의 조면공장이나 견제사 공장 소유주들에게 판매되었다. 구례를 포함한 전라남도 농촌 지역 대부분의 목화와 누에고치 생산품들은 광주와 목포의 조면공장 혹은 광주의 종연방직(가네보) 공장으로 이동되었다(Fig. 6). 생산자인 농민들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정매수인들에게 유리한 판매를 유도하기 위해서 구례 공동판매소(Fig. 4, 5)에서 등급을 매기는 과정에서 편법을 동원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조선일보』 1923년 12월 17일 석간 3면의 구례군 면화판매소에서 구례군 농민들이 생산한 면화 등급을 매수인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허위로 판정하는 것에 대한 민원기사 그리고 『조선일보』 1925년 6월 28일 석간 2면에 구례군 잠견공동판매소에서 잠견의 등급을 판정하는데, 역시 매수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하기 위해 구례군 농민들에게 부당한 등급을 판정해 주는 것과 관련된 기사들(“Gurye's Chosun Ilbo․Dong-Ah daily newspaper articles”, 2004)이 그 당시의 구체적인 실상을 제시해 주고 있다.

<Fig. 6> Gurye sericulture-drying place before sending purchased-sericulture to spinning & weaving factory of Kwangju in 1930s (Picture donated by informant)

<Fig. 4> Gurye sericulture-drying place in 1930s (Picture donated by informant)

<Fig. 5> Gurye sericulture-selling place in 1940s (Picture donated by informant)

 그러나 일제 당국의 강제적인 공동판매제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집안에 몰래 목화와 누에고치 그리고 직조한 직물들을 숨겨놓았다가 시장의 상인들에게 밀매하거나 생산품을 가지고 직접 만주까지 가서 판매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상인들은 농민들에게 비밀리에 매수한 상품들을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해 밤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판매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1942년에는 조선잠사업통제령(朝鮮蠶絲業統制令)을 공포하여 누에고치의 수매 제도를 이전의 공판제에서 일정한 양의 고치를 농가에 할당하여 강제로 판매하게 하는 공출제도로 전환하였다. 공출제는 농민들이 생산한 누에고치에 대해서 정당한 가격을 보상받는 것이 아닌 강제적 수탈의 성격을 띠게된다. 해방 이후 6.25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공동판매제도는 사라지고, 한국 정부가 누에고치 생산을 국가적으로 장려하는 잠업 증산 5개년 개획을 실시함으로써, 1950년대~1970년대 농촌 지역의 잠업이 성장하게 된다. 이와 같은 영향으로 구례 역시 잠업이 활기를 보이고, 이 시기에는 대한 잠사회의 주관하에 이루어진 협정가격제도(Ministry of Agriculture and Forestry Agriculture Management Institute, 1971)로 인해 농림부장관이 결정 고시한 가격제에 의해 누에고치가 수매되고 유통되었다. 또한 면의 경우 해방 후에 공동판매소가 아닌 5일 시장의 베전 상인들을 통해 판매와 유통이 이루어지게 된다. 70년대 이후에는 구례읍에 상설시장이 등장하는데, 그 안에 베전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되고, 직물의 유통은 상설 시장의 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6. Discontinuation of traditional cotton & silk production in Gurye

 구례의 각 가정에서 면과 견을 직접 재배하여 실로 만들고, 직조를 하는 일들은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다. 또한 6.25 전쟁 동안은 구례 대부분의 마을주민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마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반란군으로 칭하는 북한군들이 마을에 들어와서 식량과 의복, 직물류를 약탈해 가는 사건들이 있었지만, 전쟁이 구례 직물업의 구조적인 부분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6.25 전쟁 이후 한국정부는 식민지 잔재와 전쟁으로 인한 빈곤에서 새로운 산업사회로 전환시키려는 움직임 안에서 특히 견직물 부분이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고급 직물의 재료로서 고부가 가치를 지닌 누에고치 생산을 국가적으로 장려하는 잠업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농촌 지역의 잠업은 1950년대~1970년대 사이에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옥남(1918년생, 간전면)은 “40년 전부터 베 짜는 것 그만 두었어요.” 김귀두(1918년생, 토지면)는 “마을에서 베 안 짠지가 32년 전 되었어.” 김순남(1914년생, 광의면)도 “내가 50세 중반까지 베를 짰어.” 등 주민들의 면담 결과, 구례 지역에서 면직물을 포함한 견직물 등 직물 생산이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로 파악되었다.

 실제로, 1968년부터 1985년까지의 구례군의 직물 생산 자료가 제시되어 있는 구례군 발행 <구례통계연보>의 기록(Table 1)에 의하면, 면화 재배 면적과 수확량은 1968년부터 1970년까지는 일정량을 유지하고, 1971년부터 감소율을 보이고 있다. 이와같은 경향이 1973년도까지 이어지다 1979년에 다시 나타난 면화 재배 통계 자료는 1970년대 초반의 1/9 수준으로 감소되었으며, 이 수치는 이 시기에 구례에서 면화 생산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면화와는 달리 국가의 잠업 육성 정책의 지원을 받은 양잠 생산량의 경우 1968년부터 1979년까지는 비슷한 생산량 수준을 유지하다가 1980년대 생산량이 감소하고, 1980년대 이후로는 생산수치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반면에 누에가루 상품과 동충 하초용의 신잠의 생산량은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직물용 양잠의 생산량과 비교하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그에 따라 이 시기의 총 공판량도 가장 많이 증가되었다.

<Table 1> Outputs of cotton & silk from the 1968 to the 1985 in Gurye

 이는 1967년부터 1971년까지의 정부의 제 2차 잠업 증산계획의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초반 이후 면화 재배 생산량은 급속히 감소하게 되고, 양잠의 경우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직물 재배용은 감소하고, 특용 작물용의 양잠 재배량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서, 구례 제보자들의 구술 내용과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구례군의 전통 직물 생산이 급격하게 감소한 몇 가지 원인을 면직물과 견직물을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면의 생산 감소 요인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농촌 지역의 의생활이 양장과 합성 섬유 직물로 대체되는 시점과 구례 지역의 면 생산 감소 시기의 연관성이다. 개항 이후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영국제와 일본제면포가 유입되면서 수입 기계제 면포가 등장하고, 이 당시는 근대 교육을 받은 도시의 상류 계층에서 부터 서양식의 의복과 수입 직물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일본 식민지 지배 기간 동안에도 일본과 서양의 직물들이 지속적으로 수입되었고, 양장의 착용도 점점 증가해 갔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 외국 구호물자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의 의복 형태는 한복에서 양복으로, 의복 소재도 전통적인 섬유류에서 나일론 소재로 대체되어 갔다(Jin, 1990). 이와 같은 변화는 도시의 상류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변화 내용으로서 농촌 지역의 경우 도시 지역과 비교할 때 이와 같은 한국 사회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의생활 변화의 영향이 늦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전부터 주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한국 사회 전체의 사회 변화와 함께 나타난 의생활 변화가 1970년대 초반 이후에는 구례와 같은 농촌지역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음의 구술 내용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황례순(1916년생, 문척면)은 “며느리가 시장에서 서양복 사다 줌서 옷 안 만들고 사다 입었어, 그 전에는 직접 명주, 삼베해서 가래바지, 사리마다 해서 입었제.” 이춘님(1920년생, 간전면)도 “그 전에는 길쌈해서 명베로 저고리, 적삼, 치마, 고쟁이 했제, 시장에서 옷 사 입으면서 한복 안 입게 됐제, 빨래하기도 귀찮고 힘든께.”

 특히, 상품 판매보다는 자가 소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면의 경우는 1960년대~1970년대 농촌 지역에 유입된 나일론을 포함한 합성 섬유 직물이나 의복과의 경쟁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즉, 집에서 직접 목화를 재배해서 직물이나 의복까지 생산해 내는 과정에 투입되는 시간과 노동, 수익을 고려하면 1960년대~1970년대 농촌 지역에 유입된 나일론을 포함한 합성 섬유 직물과 의복의 편리함은 그 이전의 농민들과 여성들이 고된 노동 과정을 필요로 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직물 생산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 주지 못했다. 또한 1950년대 이전에는 자가 소비 이외에 전통 직물을 상품판매로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1970년대에는 직물을 생산하는데 투입되는 노동량과 수익률을 비교할 때 버섯이나 산나물과 같은 구례 산악 지역의 특용 작물 재배의 수익률이 더욱 좋았다. 더욱이 70년대 정부의 통일벼 장려 정책에 의해 통일벼 재배에 따른 농가 소득이 증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생산과정이 복잡하고, 그에 비해 수익률은 다른 특용 작물이나 벼농사에 뒤처지는 면 생산을 구례 지역 사람들은 쉽게 포기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농민들의 전통 직물업에 대한 의식의 변화 과정 안에서 농촌의 근대화 산업인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고 이 과정에서 각종 직물 생산도구들이 개량 대상이 되어 폐기되거나 땔감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빈번해짐으로써 구례지역에서도 점차 전통적인 직물 생산이나 도구는 사라지게 되었다.

 견의 경우, 해방 이후 농촌의 양잠 재배와 생산 그리고 쇠퇴는 국가 정책과 주변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62~1966년 잠업 제 1차 증산 계획으로 상전의 확대, 소잠량(掃蠶), 산견량(産繭量)이 증가되었다. 2차 증산계획은 1967~1972년으로 성공적으로 추진되었고, 특히 1968~1971년에는 전국에 12개 잠업특설지구를 설정하여 투자, 육성하였다(Ministry of Agriculture and Forestry Agriculture Management Institute, 1971). 그러나 1973년 세계적인 석유 파동으로 생사 수출이 감소하게 되자, 정부는 기존의 상전 장려 정책에서 양잠의 식용 작물로서의 재배를 유도하는 정책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정책으로 인해 1980년에는 1970년보다 상전 재배 면적이 90% 감소하게 되자, 1980년대 정부는 다시 잠사업 부흥을 위해 양잠 수출 다변화 정책과 상전을 새로 복구하여 농가에 상전 재배를 권장, 새로운 잠업 기술 보급(기존의 원시적인 재래식 지네섶을 사용하지 않고, 회전족을 공급하는 등의 노력으로 생사의 생산량과 질을 향상)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1973년부터 잠사업 불황에 1975년은 중국산 견사, 견직물, 누에고치가 대량으로 유입되었으며, 중국산과의 가격 경쟁력에서 농촌 지역에서 생산한 제품이 밀려나게 된다. 정부는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생산 장려금 제도를 도입하지만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고, 구례를 포함한 농촌 지역 누에고치 생산자들은 견사와 견직물 생산은 중단하고, 동충하초와 같은 비직물용 상품 생산으로 전환을 하게 된다. 따라서 구례통계연보 <Table 1>에서도 1973년 이후 양잠 생산량은 점차로 줄어들지만, 1974~1976년 사이 누에가루와 동충하초용의 신잠 생산량의 증가와 함께 양잠판매석수가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79년에는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1981년 이후로는 구례지역에서 양잠 생산이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V. Conclusion

 본 연구는 1930년대~1980년대까지 전라남도 구례군의 면직물과 견직물 생산 방식의 특징과 변화과정을 살펴보았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섬유재배와 제사 방식에서 1930년대 면 재배 방식은 재래면에서 대체된 육지면, 황면의 두 가지 종류가 재배되었고, 대부분 자신의 논, 밭에서 직접 재배하였다. 그러나 수냇베, 산악 지대 거주민들의 사례와 같이 면 섬유를 얻는 방식은 계층적, 거주 환경에 의해 차이를 보였다. 견은 산악지대가 발달된 구례의 자연 환경적 특징으로 인근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구지뽕나무를 먹여 집에서 조선누에를 길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왜뽕나무의 도입과 함께 조선누에는 왜누에라는 개량종으로 전환되었다. 제사 방식에서 면은 1930년대~1950년대까지 개별가정에서 개인 소유의 제사 도구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1940년대~1950년대에는 큰 시장의 씨앗이 방에서 족답식 조면기에 의한 조면, 솜 타는 과정이 이루어지고, 물레, 직조는 개별 집에서 행해지는 방식이었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에는 일부 방앗간에서는 여전히 씨앗이방과 같은 조면과 타면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면 제사 방식은 1970년대 이후 면직물 생산이 사라지게 된 시점까지 지속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견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 공동판매의 주 대상은 견사와 견직물이 아닌 누에고치 자체였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견의 제사 기술과 도구의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구례군의 제직 도구와 기술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 베틀에서 족답식 직기로 변화되었다. 제사 이후 제직 준비 과정은 다른 지역과 동일하였으며, 제직도구 역시 섬유의 종류에 따라 구분되지 않았다. 족답식 직기로 전환된 경우에도 구례군에서는 평직물 이외 문양직물 직조 사례는 없었다. 염색은 섬유의 종류 상관없이 모두 후염하였지만, 견의 경우는 대부분 염색하지 않고 판매되었다. 염료는 천염 염색은 거의 없었고, 시장에서 화학염료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유통에 있어서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오일시장의 베전에서 거래되고, 보부상들 혹은 객주에 의해 전국의 다른 지역으로 유통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면과 견 모두 제직된 상태보다는 조면된 면과 누에고치 형태로 공동판매소에서 매수되는 형태였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구례군의 면과 견의 섬유 재배 및 제직량이 감소하게 된다. 그 이유는 섬유별 차이가 나는데, 면 생산량 감소는 한국 농촌 지역의 의생활이 양장과 합성 섬유 직물로 대체되는 시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견 생산량 감소는 해방 이후 국가에 의한 잠업 부흥 정책의 지속과 변화, 중국산 견사의 유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문헌조사, 1930년대~1980년대 구례군의 직물 생산과 관련이 있는 주민들에 대한 면담조사, 사진, 통계 자료들을 통해 근대 이후 한국 지방의 직물 문화의 특징과 변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연구 자료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본 연구 대상지인 구례군과 같이 과거부터 중요한 전통 직물 생산지였음에도, 현재까지 학술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들의 전통 직물 문화에 대한 조사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점을 본 연구를 통해 제기하고 싶다. 연구자는 후속 연구로서 구례군 이외 호남의 다른 지역들의 근대 이후의 직물 문화의 특징과 변화 양상을 규명하는 연구를 지속해 나갈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들은 한국 지역별 전통 직물문화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시할 것이다. 참고로 본 연구에서는 구례군의 면직물과 견직물만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구례군의 대마(삼베) 생산 방식과 그 변화 양상은 연구 내용이 많아, 별개의 다른 연구로 제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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